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커우 공원 의거 (문단 편집) == 장제스 연구 이전의 인식 ==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. 오로지 윤봉길을 통해 한국이 독립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에 불과하지만 윤봉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꽤나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다. 실제로 이 사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제 나라도 간수하지 못해 빼앗긴 주제에 중국에 [[밀입국]]해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는 [[불법체류자]], '일제의 앞잡이' 등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. 이 때문에 [[만보산 사건]], [[민생단 사건]][* 단 이는 [[중국공산당]]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.] 같은 화교 -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. 그러다가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에서 ^^일본 입장에서^^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이게 조선인 청년 한 명의 의거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을 항일운동의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졌다. 더군다나 윤봉길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고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[[장제스]]가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를 상당하게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. 다만 장제스가 "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."라는 말로 극찬했다는 건 와전이다.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문단을 참조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locationart.co.kr/s_Janggaesuk.jpg|width=100%]] }}} || 사진에서 보듯 나중에 장제스는 윤봉길의 거사에 장렬천추(壯烈千秋)[* "장렬한 그 의기 천년에 빛나리라"라는 의미다.]란 휘호를 써서 유족에게 전달해 주기도 했다. 이후에도 장제스는 [[상해임시정부]]를 승인해 주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임시정부에 물적 지원을 제공하는 등[* [[중일전쟁]] 중 충칭으로 수도를 옮길 때 차량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천 대로도 모자랄 지경에 1백 대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에 6대를 할당해 주었다.]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. 또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지지하고 [[카이로 회담]]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자체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. [[https://gall.dcinside.com/board/view/?id=cartoon&no=431294|#]][[https://bbs.ruliweb.com/family/212/board/1010/read/30604991|#]] 결국 윤봉길의 희생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이끌어낸 계기가 된 것으로 인식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